어느 시의 초상을 그리려면
괜찮으시담詩談 05
정원
크림이는 볼을 덮는 큰 귀와 납작한 코, 검고 반짝이는 입술과 가지런한 아랫니,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눈매를 지녔다. (덕분에 10시 10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가끔 짧게 점프한 뒤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배뇨 실수 등으로 따끔하게 혼이 나도 금방 기쁨 재채기(놀이 재채기라고도 한다)를 하는 맑고 무던한 성격이다.
우리는 한 달 동안 결혼 여행을 떠나기로 했고 친구에게 탁견을 부탁했다. (구글 문서의 맞춤법 교정기가 자꾸 탁견을 택견으로 교정해 준다) 친구가 빈집에 머무르며 크림이를 돌봐 주는 식이었다. 탁견을 부탁받은 친구는 무척 꼼꼼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어서 구글 문서로 서로 알아야 할 내용을 공유하자고 제안했고 집에서 가까운 동물병원의 위치와 크림이의 특징, 자주 하는 실수, 산책 범위 등이 담긴 크림이 백과사전과 다름없는 공유 문서를 만들었다. 여행 기간 중 궁금한 점이 생기면 그때그때 업데이트하겠다고 말했다.
간혹가다 친구는 우리가 여행하는 동안 크림이의 근황 사진과 간식을 받아먹는 동영상 링크 등을 업데이트해 주었다. 크림이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잘 눕고 잘 먹고 때론 간식에 굴종하며 곧잘 적응하여 지내는 듯 보였다. 우리는 새로 도착한 크림이의 사진을 볼 때마다 분리 불안을 느끼는 쪽은 정작 우리라는 걸 알아챘다. 기분이 좋아 몸을 부르르 떠는 크림이가 머릿속에 계속 그려졌다.
모든 항공사에서는 7㎏을 초과하는 강아지를 위탁 수하물로 분류한다. 7㎏을 훌쩍 넘는 크림이는 기내에 탈 수 없을 뿐더러 코가 납작하기 때문에 위탁 수하물로도 분류될 수 없다. 2018년 3월, 유나이티드 항공의 여객기에서 짐칸에 탄 프렌치 불도그가 호흡 곤란으로 질식사하는 일이 생기면서 항공사들이 줄줄이 단두종 개와 고양이의 반입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속상하고 참 허탈한 일이다. 크림이를 통로 쪽 좌석에 앉힐까 창가 쪽 좌석에 앉힐까 고민하는 들뜬 상상을 잠깐 해 본다.
우리가 두고 온 것이 흔한 우산이었으면 좋겠어
너는 마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말한다
고작 일주일간의 여름휴가일 뿐이야
일주일은 아주 짧은 시간이라구
너는 계속 침울하다
걷고 있지만 한걸음도 떠나지 못한다
버려졌다는 기분이 들면 어쩌지?
기차에 앉아서
우리가 곧 데리러 간다는 걸 알고 있을까?
낯선 나라의 음식을 앞에 두고
네가 펼친 지도에는 앞이 없다
네 눈동자에는 고름처럼 시간이 고여 있다
뒷모습은 짐작하지 못한 방향에서 탄생하는 것
어떤 길은 낮잠 같았고 어떤 길은 발톱을 세웠다
앞으로는 기억을 부위별로 저장하는 습관을 들여야겠어
우리는 구석에 놓인 두개의 검은 비닐봉지처럼
차들이 쌩, 하고 지나가고
회전문이 빠르게 돌아가고
접시 위로 접시가 쌓이고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고
길을 건너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쪽으로 되돌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사과는 기억하고 있을까?
제 몸을 통과해간 태양과 바람의 행방
씨앗을 쓰다듬던 밤의 손길
왜 괜한 사과 얘기는 하고 그래?
고양이 하나를 맡겼을 뿐인데
우리의 여행은
되돌아가기 위한 여행이 되었다
우리는 떠나온 적도 없고 서로를 버린 적도 없다고 말해야 했다
- 안희연 「탁묘」, 창비시선 393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2015)
2020. 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