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예감
- 에릭 로메르 「겨울 이야기」, 서울아트시네마, J열 6번
김현(시인)
출근길 지하철에서 씁니다.
누나는 아직 꿈나라겠죠? 저는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 시를 한 편 적고, 헐레벌떡 씻고 집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저는 가련한 시인인가요, 노동자인가요, 인간인가요. 지금, 이 순간 폴란드 그단스크 항구의 밤거리와 물안개와 야경은 얼마나 더 근사하게 여겨지는지요.
작년 이맘때 크게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피곤하다’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주말에도 아침 일찍부터 일과를 시작하곤 했는데, 요즘엔 그 시간에 더 잡니다. 아침잠이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보다 훨씬 더 행복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어요. 주기적으로 겨울잠을 잔다는 성은 누나에게 딱 한 가지만 본받아야 한다면 바로 잠이 많은 것입니다. 작년 겨울부터 이렇게 마음먹고,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하는 ‘능률적인 인간’에서 저는 점차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집안의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부산히 움직이던 저희 엄마는 몇해 전부터 무릎관절이 나빠져 이제는 누구보다 느릿느릿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늙어감에 따라 바쁨의 생체시계는 고장 나고 느림의 생체시계를 장착하게 되는 건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바쁜 사람보다 느린 사람이 자연에 가까운 인간이라 생각해요. 삶보다는 죽음이 훨씬 더 자연에 가깝지요. 이런 생각은 회의적이거나 냉소적인 걸까요? 시곗바늘을 5분 일찍 맞춰두는 사람은 있어도, 5분 늦게 맞춰두는 사람은 없겠지요? 하지만 누나,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런 사람이 없어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어가는 과정이 아닐까요.
요즘 ‘안식’에 대하여 자주 생각합니다. 안식일의 평화에 대해서요. 최근 암 투병을 하던 친구가 하늘나라로 떠났거든요. 친구는 떠났는데 친구와 주고받았던 사진과 메시지는 휴대전화에 그대로 남아 있어서 친구의 빈자리를 그 흔적들로 대신해 보았습니다. 불현듯 살면서 되도록 많은 흔적을 남겨놓아야겠구나, 염원하게 되었어요. 그 많은 기쁨의 흔적들이 과연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중화시키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쳤습니다. 처음이었어요. 친구가 홀연히, 영원히 떠난 이야기는. 지난밤 짝꿍은 잠에서 깨어 그 친구가 꿈에 나왔다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습니다. 짝꿍의 등을 어루만져 주면서 감히 ‘우리의 삶’을 갸륵하게 여겼습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유일한 청자”가 되어주는 일을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인생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소박한 것임을 우리는 언제부터 예감하게 되는 건 걸까요.
지난여름에 누나와 본 에릭 로메르의 영화 「겨울 이야기」가 있지요. 사소한 실수로 엇갈린 두 남녀가 기적과도 같이 만나게 되는 영화. 아니 기적이라기보다는 한 여성의 예감, 비논리, 운명에의 믿음이 뭇사람들의 예측, 논리, 현실에의 요구를 넘어서 결국엔 재회를 이루어내는 영화지요. “희망을 품고 사는 게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해”라는 주인공의 말을 기억합니다. 희망은 예측이 아니라 예감에 더 가까운 단어라고 믿고 싶어요. 그러니까 ‘예감을 품고 사는 게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해’라고 바꾸어볼 수도 있겠지요. 오늘날 우리는 컴퓨터와 휴대전화에 종속된 ‘예측의 노예’들이 아닌가요? 예감을 믿는 인간이란 희귀종이지요. 문학 역시 예측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예감의 산물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소설가는 뭇사람들 편에선 어쩐지 현실에서 붕 떠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휴가지에서 나눈 열렬한 사랑을 운명으로 여기고 언젠가는 상대를 다시 만나리라는 예감을 삶의 심지로 삼은 ‘펠리시’. 그는 글을 쓰는, 예술하는 인간과 닮지 않았나요. 그 변덕과 자기애와 고집도요.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 역시 추상미라는 인간, 여성, 어머니의 ‘우울한 예감’으로 시작된 영화지요.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송이’ 역시 예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언젠가는 남동생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슬픈 예감’을 믿으며 송이는 남한에서의 삶을 부러 더 기쁘게 받아들이려 애쓰지요. 그렇기에 저는 송이의 환한 얼굴보다 무표정, 송이의 단호한 거절이 송이의 본질적인 얼굴처럼 느껴졌습니다. 예감하는 얼굴은 기대보다 온화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네요.
며칠 전, 우연한 기회에 한 탈북인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가 탈북인이라는 말을 꺼내자, 실례인 줄 알면서도 무심결에 아, 탈북인이셨군요,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하더군요. 남한에서 원하는 탈북인의 모습은 정해져 있는 것 같다고요. 탈북인 하면 무조건 체제 부적응자로 인식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하며 그는 자신의 대학 생활, 대학원 생활, 단란한 가정사, 그리고 밝고 씩씩한 탈북인 청년들의 남한 정착기를 거듭해 들려주었습니다. 예측이 빗나갈 때 새삼 돌아보게 되는 것도 많지요.
해진 누나, 누나가 건넨 물음이 언젠가는 제가 누나에게서 받게 되리라 예감한 질문이라고 하면 믿을까요? 누나의 소설들은 항상 ‘인간은 아름답니?’라고 묻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답하게 되니까요. 인간은 아름다울 수 있다고요. 누나, 저는 아무래도 인간은 저마다 아름다운 슬픔의 조각을 지니고 있다고 여기는 쪽인 것 같아요. 이런 생각은 어리석고 추한 것일까요. 언젠가 죽고 싶지만, 소설은 쓰고 싶다는 청소년 성소수자를 앞에 두고 구십구 방울의 슬픔이 아니라 한 방울의 기쁨이 더 소중한 소설을 쓰면 좋겠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믿고, 쓰고 있다고요. 제 말은 그에게 적확한 것이었을까요.
어제는 퇴근하며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 하고 읊조렸습니다. 때가 되면 자연스레 이렇게 떠올리는 인간은 아름다울 수 있지 않나요? 그런 생각을 아무 거리낌 없이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은 참말로 인간적입니다…… 만 24세의 비정규직 발전노동자였던 김용균 씨의 생전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았습니다. 부모님이 사준 양복을 입고 새 구두를 신고 수줍게 웃으며 허리에 두 팔을 올리고 뽐내던 그 모습은, 아름다웠다고 감히 말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 취급하지 않는, 분리된 머리와 몸보다 컨베이어벨트의 안위를 걱정하고 발전의 원동력을 점검하는 인간들을 아름답다고 여길 수 있을까요. 김용균 씨도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 하고 그 먼지 구덩이에서 환한 빛을 밝히고 잠시 생각하기는 했을까요.
해진 누나, 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에릭 로메르의 ‘계절 연작’ 중에서 굳이 「겨울 이야기」를 고른 이유를 혹시 말해주었던가요? 누나가 물었던가요? 제가 6월에 이 영화를 누나와 함께 보고자 한 이유는, ‘로메르의 영화 중 가장 행복한 결말을 보여주는, 오랜 기다림 끝에 신이 내린 축복처럼 아름답고 소박한 사랑의 기적을 선사하는 작품’이라는 한 줄의 설명 때문이었어요. 행복한 결말, 신이 내린 축복, 아름답고 소박한 사랑의 기적 같은 문구는 연약한 인간을 강인하게 하지요. 그렇지 않나요? 그래서 그날, 영화를 본 뒤 청계천을 걷다가 종로3가 전집에 가서 누나와 제가 그토록 맛있게 빈대떡을 먹었겠지요. 기름에 빈대떡 지지는 냄새는 언제 맡아도 인간을 아름다울 수 있게 합니다.
오늘 점심에는 구수한 것을 챙기고, 오후에는 상수역 ‘나들목’에서 회사 송년회를 합니다. 저녁에는 해방촌 ‘고요서사’에서 낭독을 하고요. 밤에는 또 쓰겠지요. 묻겠지요. 늦게 자는 새도 피곤하겠지요?
추신: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보는 내내 저 역시 ‘로기완’을 떠올렸습니다. 폴란드의 어떤 풍경이, 폴란드에서의 어떤 경험이 누나가 로기완을, ‘전 세계의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을 만날 수 있게 하였는지요.
폴란드로 떠나기 전에 누나는 막연히 희망했었죠. 쓸 수 있기를, 끝을 내지 못하더라도 일단 쓰고 나서 절망하기를, 한 사람을 완벽에 가깝게 이해하기를, 하고요. 그 예감은 ‘폴란드라는 시간’을 통과해 결국 한 권의 책이 되었습니다. 아름답고 소박한 기적.
해진 누나. 저는 오늘 새벽에 어떤 예감을 이런 시구절로 적었습니다. ‘눈이 녹으면 사람들은/ 다시 눈을 기다린단다’ 저의 예감은 따뜻한 것이었을까요, 차가운 것이었을까요? 다음 편지에서는 영화 「패딩턴」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한 사람의 얼굴에 대해서요.
2018. 1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