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잖아요, 살아 있는 일
- 키키 키린 「일일시호일」

김현(시인)


“눈송이처럼 모서리가 없는 상념”이라는 문장을 몇 차례 되뇌어 보았습니다. 상념은 머릿속이 아니라 마음속에 떠오르는 여러가지 생각이지요. 머리로 하는 생각과 마음으로 하는 생각은 어떻게 다를까. 생각이 머무는 장소를 생각하다가 눈송이처럼 머릿속에 흩날리던 생각들이 마음으로 내려앉는 풍경을 떠올렸습니다. 봄볕에 부딪힌 마음의 적설이 졸졸 어딘가 더 먼 곳으로 흘러가는 그림은 퍽 그럴싸한 상념의 최후. 그런 최후를 운명처럼 간직한 상념은 몇번이고 반복해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누나, 오늘은 봄의 기운이 완연합니다. 미세먼지가 걷힌 하늘은 파랗고 공기는 쾌청하여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 환기했습니다. 겨우내 머물러 있던 잡념이 훌훌 날아갔다고 하면 거짓이겠으나 어쩐지 오늘은 그런 악의 없는 거짓을 진실에 포함하고 싶습니다. 거짓은 진실에 가장 가까운 진실. 얄팍한 마음이 되어 가방을 꾸렸습니다. 서둘러 집을 나섰습니다. 회사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지요(오늘은 월차!). 어디 멀리 갈 심사가 아니라 어디든 가까운 곳으로 나앉아 있고자 하였어요. 마음이 가까이 머무는 곳은 추억이 서린 데지요. 더 멀리 떠나는 마음은 대체로 추억을 돌이켜 생각하기보다 추억을 싹싹 지우려는 몸짓 아닌가요. 여하튼 봄에는 누구나 반짝 마음속 지리에 훤하게 됩니다. ‘지금 이 숲에, 지금 이 모래사장에, 지금 이 언덕에 가면 된다.’ 통유리로 된 카페 창가에 앉아서도 산 넘고 바다 건너 희희낙락하지요. 아닌가요? 제 이런 생각은 섣부른가요? 누나는 봄이 되면 몸이 근질근질하지 않나요? 몸과 마음이 잠시 일맥상통해지는 때를 봄이라고 부르는 이가 저 말고도 있겠죠? 이런 저를 보며 짝꿍은 “그저 코에 바람만 들어가면 강아지처럼 좋아서……”라고 말하곤 합니다. ‘봄의 강아지’라는 문장은 산들바람에 나부끼는 강아지풀을 바라볼 때처럼 괜스레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지 않나요. 봄에는 이토록 봄 얘기만 종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아무래도 봄을 타는 인간. 얼마 전, 동료 영영이 제게 이런 상냥한 경고를 전해 왔습니다.
“대리님, 저 봄 엄청 탑니다, 조심하세요!”
봄을 타는 인간과 가을을 타는 인간 중에 더 위험한 인간은 어떤 인간일까요. 봄을 타는 인간은 어쩐지 마음에 생각의 창구를 여럿 열어두는 사람 같고, 가을을 타는 인간은 머릿속에 생각의 창구를 단 한군데만 열어두는 사람 같습니다. 봄에는 나부끼고 가을에는 추락합니다. 누나, 누나는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올라 흩어지는 사람에 가까운가요, 낙엽처럼 떨어져 내려 고이는 사람에 가까운가요? ‘속마음에 걸려 바깥에서 먼저 넘어지는 사람’은 나름 흔쾌한 사람이지 않나요? 속마음에 걸려도 넘어지지 않기 위해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사람을 그려보면…… 산다는 건 잘 넘어지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마음에 지지대를 세우고 또 세우는 사람이거든요. ‘봄에는 넘어지자!’라는 경구를 생활의 누추함이 아니라 마음의 누추함을 대비하기 위해 간직한다면 봄을 엄청나게 타는 일도 조심할 일은 아닐 것 같아요.

계절을 타는 영화도 있지요.
「나 홀로 집에」(크리스 콜롬버스, 1991)나 「러브 액추얼리」(리차드 커티스, 2003) 같은 영화는 겨울,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자연히 떠오르고요, 김 서린 유리창에 비친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의 얼굴만으로도 「캐롤」(토드 헤인즈, 2015)은 이미 겨울 속에 있습니다. 두 남자의 사랑과 이별을 담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루카 구아다니노, 2018)은 여름의 빛깔과 향취로 가득하고요, 「굿바이 마이 프렌드」(피터 호튼, 1995)에서 두명의 소년은 질병을 우정의 장애가 아니라 장애물로 여기지요. 간단히 뛰어넘을 수 있는. 그런 모험은 언제나 여름의 것.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갖춰 입고 오토바이로 도로를 질주하던 유덕화와 오천련의 비장한 사랑은(「천장지구」[진목승, 1990])가을에 음미해야 더 뜨끈뜨끈합니다.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2001)는 봄의 생동보다는 봄의 생동감 뒤에 엄습해 오는 청승에 관한 두말할 나위 없는 영화이고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서 계절과 날씨는 인물의 심사를 자주 대신합니다. 죽은 이의 산소를 다녀오는 것으로 시작되고 끝나는 영화 「걸어도 걸어도」(2008)에서 여름의 볕과 초록과 더위와 그늘과 풀벌레 소리는 등장인물들의 애상을 더 짙게 전달해요. 오즈 야스지로의 계절 연작들(「만춘」[1949], 「초여름」[1951], 「이른 봄」[1956], 「가을 햇살」[1960] 등)은 제목만으로도 이미 영화 전체를 환기합니다. 가령, 아내를 잃고 혼자된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 붙은 ‘만춘’은 얼마나 타당한지요.
어제는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다도 체험을 하는 외국인들이 등장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차를 우리고 내리는 일에 담긴 심사를 잠시 느껴보았습니다. 그런 연유로 「일일호일시」(오모리 다츠시, 2018)을 찾아보게 되었지요. 실은 배우 ‘키키 키린’의 유작인 데에 더 큰 의의를 두었지만요.
영화는 스무살 노리코가 사촌 미치코를 따라 이웃에 사는 다케타 선생에게 다도를 배우게 되면서 차츰 ‘자신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얘길 담고 있습니다. 아니 깨달음은 너무 거창하고요, 나를 둘러싼 상념을 우리고 내리는 가운데 생각지도 못했던 나를 만나게 되는 영화라는 편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때론 깨달음보다 만남이 중요할 때도 있지요. (‘내면의 나’를 포함하는) 타인을 위해 차를 우리고 내리는 일이 곧 삶임을, 인생은 ‘매일매일 좋은 날’이라는 낙관을, ‘같은 사람들이 여러번 차를 마셔도 같은 날은 다시 오지 않으니 생애 단 한번이라고 생각해주세요.’라는 평범한 참가치를, ‘다도는 형식이 먼저, 마음은 나중에 담는다.’라는 아리송한 인생의 성찰을 들려주는 노인, 키키 키린의 연기가 마치 실제인 양 여겨져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그동안 고마웠어요, 키키 키린 씨).
감독이 들려주는 이런 일화를 보세요.
“노리코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노리코와 다케타 선생이 가만히 앉아 흩날리는 꽃잎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어요. 원래 시나리오에는 ‘눈물을 흘린다.’라고 되어 있는데 (키키 키린이) ‘굳이 안 흘려도 되지.’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어요.”
누나,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인생의 끝자락은 겨울이 아니라 늦은 봄인가 봐요. 절기에 맞춰 마시는 차와 찻잎에 따라 우림과 내림이 방식이 달라지는 다도가 인생의 축소판이라면, 누나 지금 우리는 어디쯤에서 무슨 차를 마시고 있어야 하는 걸까요?
볕이 넉넉히 드는 창가에 앉아 버스 라디오를 통해 들었던 이런 봄맞이 사연을 다시금 음미해보았습니다.
“단감 가지를 자르고 있습니다. 가을을 위해 봄부터 바쁩니다.”

추신:
지난번 누나가 전해준 ‘부제’를 저는 정답으로 여기기로 했습니다. 그 시의 제목은 ‘송가’였는데요, 환송의 노래를 환대의 노래로 바꾸어주는 부제를 시의 일부처럼 간직하고 싶어졌습니다. 허락해주실 건가요?

2019. 3.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