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이 영화가 된다면
- 오늘의 상영작 미정
김현(시인)
‘동시 상영’이라는 봉투에 담긴 소설가님의 편지들을 거듭하여 읽었습니다. 편지를 펼친 공간이 하필이면 매번 버스나 열차였고, 시간은 밤이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 읽지 못하고 끊었다 다시 읽기를 반복했지요. 아니 일부러 그리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겨지는 사람이 아니라 떠나는 사람처럼 그러했다고 말한다면 이해하실까요. 소설가님과 편지를―편지란 영화적이지요!―주고받은 지난 1년을 제 나름으로 되돌아보니 ‘기쁨 한 방울’이 담긴 마지막 편지가 빛을 머금은 밤의 식물처럼 푸르스름했습니다. 이야기의 끝에 가선 매우 이성적인 사람도 얼마간 감성적인 사람이 되곤 하는데, 이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저로서는 속수무책으로 감성적인 짐승이 되어 그 우정의 숲을 서성였습니다. 가끔은 맑은 시냇물에 발을 담가보기도 하고 “시간은 참으로 정직하게”라는 소설가님의 문장 뒤에 징검다리를 놓듯 잠시 말줄임표를 붙이고 건너보았습니다.
매일 똑같은 하루를 반복해서 사는 이가 등장하는 「사랑의 블랙홀」(해롤드 래미스, 1993), 친구로만 여겼던 이의 사랑 고백을 물리기 위해 ‘타임 리프’ 하는 소녀가 튀어나오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호소다 마모루, 2006), 한 여인과의 완벽한 사랑, 완벽한 행복을 완성하기 위해 계속해서 시간을 넘나드는 남자의 이야기 「어바웃 타임」(리처드 커티스, 2013) 같은 ‘시간에 의한’ 영화들이 자연히 떠올랐지요. 뱀파이어 커플 아담과 이브가 나오는 짐 자무시의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2013)나 드라큘라가 등장하는 수많은 영화도 삶과 죽음, 불멸이나 영생에 대해 질문하게 하므로 시간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 우주의 탄생과 생명의 기원, 신에게 끊임없이 구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목소리를 담은 테런스 맬릭 감독의 「트리 오브 라이프」(2011) 같은 영화도 빠지면 안 되겠죠.
영화가 시간의 산물임을 최선을 다해 증명하는 영화도 있습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보이후드」(2014)입니다. 이 영화는 12년 동안 같은 배우들로 촬영을 이어가며, 여섯 살 아이였던 메이슨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가 아니라 사실로 담아냅니다. 성장을 재현하는 영화가 아니라 성장을 기록하는 영화지요. 이 영화가 종국에 실현하는 어떤 경이는 그러니까 한 감독(사람)이 영화 속 시간과 영화 밖의 시간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데서 찾아옵니다. “그 영화를 사랑하는 건 그 영화가 세상을 다루는 방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영화를 사랑하는 건 세상을 사랑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들뢰즈의 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 사랑에는 어떤 숭고한 면이 있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걸 잊으면 안 된다.”(『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바다출판사 2010)라는 평론가 정성일의 말을 새삼 덧붙여볼 수 있겠지요.
소설가님.
켄 로치 감독의 영화들을 떠올리며 적은 글들을 모아 묶은 저의 첫 번째 산문집에 소설가님은 “나에게는 시인 김현의 글과 삶이 영사되는 나 혼자만의 영화관이 있다.”라고 시작하는 우정의 글을 보태어주었습니다. 그 다정한 언어를 새삼 상기하자니 지난 1년간 소설가님의 영화관에선 제 영화가, 제 영화관에선 소설가님의 영화가 동시에 상영되고 있었던 셈이구나, 하는 생각에 가닿더군요. 다시 한번, 시간을 되돌리는 것처럼 소설가님께 이런 제 삶의 풍경을 가만히 적어 보내고 싶어졌습니다. 마치 처음처럼. 소설가님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를 저는 이렇게 시작했지요. 출근길 지하철에서 씁니다.
저는 요즘 새 책이 나와 무척 바삐 지내고 있습니다.
몇 주 사이에 대전, 대구, 광주, 제주를 다녀왔고, 금주에는 속초에 자리한 ‘완벽한 날들’이라는 책방에서 독자들과 만날 예정입니다. 새로운 책을 들고 서울을 벗어날 때면 늘 여행하듯 다녀오자 마음먹음에도 얼마 전 밤 기차에선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서 ‘속초를 마지막으로……’ 순회 낭독을 마무리해야겠다,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건강한 작가에서 허약한 직장인으로 태세를 전환했지요. 신기하게도 직장인일 때의 김현과 작가일 때의 김현은 전혀 다른 에너지원을 가지고 몸과 마음과 정신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직장인일 때 저는 ‘읽고 쓰는 힘’으로 버티고, 작가일 때 저는 ‘홍삼농축액’으로 버티고 있다고 한다면 웃으실까요? 어쨌든 먹고살기 위해 일하며 사는 이들은 대체로 조금씩은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셈 아닌가요. 평일에 일하는 ‘나’와 주말에 쉬는 ‘나’는 분명 같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잖아요. 물론 전업으로 글을 쓰는 소설가님은 월화수목금, 토일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시간표를 가지고 훨씬 다채로운 생활을 하고 있겠지요.
그렇다면 소설가님, 우리의 이런 삶이 영화가 된다면 그 영화는 드라마에 가까울까요? 뮤지컬에 가까울까요? 공포와 스릴러에 가까울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울음과 웃음 중에 하나를 가지고 영화를 시작할 수 있다면 소설가님은 어떤 선택을 하실까요. 소설가님은 아마도 눈물로 시작해 눈물로 끝나고, 웃음으로 시작해 웃음으로 끝나는 영화는 시시하다, 여기는 편이겠죠. 웃음과 울음이 뒤범벅되거나 웃는 게 웃는 게 아니고 우는 게 우는 게 아닌 영화에 더 마음을 빼앗길 겁니다. 삶이 바로 그러하니까요.
소설가님.
이즈음 끝이 아니라 시작을 얘기하는 것이 소설가님과 제게 주어진 진정한 과제 같다고 제가 넌지시 말한다면 소설가님은 고개를 갸우뚱거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지요. 남겨지는 사람이 아니라 떠나는 사람이 늘 시작하길 원합니다. 이렇게요.
또 편지할게요.
p.s.
소설가님, 달력을 펼치고 시간을 이리저리 잘 쪼개 일정을 잡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은 시간에 이끌려가고 있는 것일까요, 시간을 이끌고 있는 것일까요?
되풀이되는 듯 결코 되풀이되지 않는 시간의 흐름을 처음으로 공식화한 사람은 어떤 이였을지. 하루가 다르게, 새롭게! 완성되어가는 자연의 순환에 최초로 의미를 부여했을 그 사람은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외계인’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이는 몇 날 며칠 나무 아래 누워 잎을 관찰하거나 해변에 앉아 멍하니 바다만을 바라보던 사람이었을 테니까요. 그리 생각하면 “우리는 조금씩은 외계인”이라는 말은 우리 각자가 남들은 쉬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고유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찍고 바로 확인할 수 있는 휴대전화나 디지털카메라 대신에 필름 카메라를 더 선호하는 사람은, 구형 MP3를 들고 다니며 저장된 음악을 듣는 사람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밤 아홉 시만 되면 물구나무를 서는 사람은, 불타는 금요일 밤에 세계 맥주와 과자 한 봉지를 앞에 두고 밀린 드라마를 몰아 보는 사람은, 오후 두 시만 되면 어김없이 꾸벅꾸벅 조는 사무원과 탁상 모래시계를 구입해 수시로 앉고 서기를 반복하는 책상 생활자는, 인적 없는 숲속 호수에서 훌훌 벗고 수영하는 연인들은, 맑은 날씨를 유도할 수 있는 인물을 상상하는 창작자는, 세상(대의)을 위해 한 사람을 희생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연대자는, 무엇보다 작은 동전 지갑을 선물 받고 작은 동전 지갑을 선물하는 두 친구는 그 자체로 ‘동 시간대’라고 간단히 이름 붙일 수 있는 시간의 빛깔을 다채롭게 합니다.
소설가님.
타인의 시간에 마음 쓸 때 우리의 시간은 비로소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향한다,라는 말은 지나치게 거창한 것일까요. 그런 믿음이 마침내 사람이라는 말을 희망과 연대와 온기라는 말로 변화시킨다고 한다면 너무 틀에 박힌 걸까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 속의 나 자신을 상상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 최선을 다해 현재를 살지요. 타임머신은 과거를 바꾸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미래를 바꾸고자 하는 사람의 현재적 발명품. 그러니 이렇게 저희들의 동시 상영을 끝맺을 수도 있겠습니다.
내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020. 01.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