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값
- 영화 「긴 이별」(The Long Goodbye)
정수영(영화인)
새벽 세시, ‘필립 말로’는 단잠에서 깨어난다. 배고픈 고양이가 그를 깨웠다. 억울할 것도 없다. 고양이를 키우는 일이란 그런 것이니까. 문제는 커리 브랜드 고양이 사료가 다 떨어졌다는 사실이다. 고급 마카로니 치즈에 달걀을 풀어 진상해봐야 별무소용. 고양이는 오직 커리 브랜드만을 원한다. 구시렁대며 찾아간 슈퍼마켓의 진열대에는 커리 브랜드를 제외한 온갖 종류의 고양이 사료들이 쌓여 있다. 일이 꼬여가는 방식이란 게 대체로 이렇다.
영화 「긴 이별」포스터
그러나 이 남자 필립 말로는 얼마나 염치를 아는 사람인가. 그는 아직 집사의 명예를 포기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간 그는 고양이를 따돌리고 부엌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다. 그리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금 사온 고양이 사료를 커리 브랜드의 빈 깡통에 옮겨담는다. 그는 그렇게 위조한 사료를 슈퍼마켓에서 들고 온 종이봉투에 넣은 후 다시 부엌문을 열고 나선다. 수상한 눈으로 따라붙는 고양이에게 ‘그래 너 배가 고프댔지? 내가 담배 한대 피우고 네가 좋아하는 맛 좋은 커리 브랜드를 꺼내줄게.’ 다정도 병인 양하여.
아직 끝이 아니다. 남자는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을 거꾸로 한번 더 되풀이한다. 슈퍼마켓 봉투를 열고 거기에서 방금 자신이 제조한 가짜 커리 브랜드 캔을 꺼낸 후, 오프너로 뚜껑 따는 시늉을 한 후에야 비로소! 고양이는 식사를 대접받는다. 그런데 과연 고양이가 그 밥을 먹을 것이냐?
레이먼드 챈들러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로버트 앨트만의 「긴 이별」(The Long Goodbye, 1976)은 사립 탐정 필립 말로가 고양이 밥을 주기 위해 깨어난 이 밤에 일어난 살인사건으로부터 출발하는 영화다. 사람이란 종은 어울려 살아 버릇해서, 사람 하나가 죽으면 그 목숨값 만한 소동이 따라붙게 마련. 그런데 이 목숨값은 어떻게 재어볼 것인가? 때때로 그것은 커리 브랜드 사료 정도의 값어치일 수도 있을까? 필립 말로같이 꼼꼼한 신사가 그 목숨값을 한번 세세히 따져보자 할 때 우리는 이런 질문 앞에 선다.
2017. 6. 16